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치양 전투 (문단 편집) === 붉은 깃발의 군대 === 양군은 치양에서 진을 치고 대치했는데, 이 때 [[사기(백제)|사기]](斯紀)라는 사람이 [[고구려]] 진영에서 탈영해 [[백제]] 진영으로 넘어오는 일이 발생한다. 사기는 원래 백제 출신으로, 왕이 타던 말발굽에 상처를 낸 사건으로 벌을 받게 될 처지가 되자 고구려로 망명했던 적이 있었다. 그렇게 치양에 종군했다가 다시 백제 진영으로 돌아온 것이었다. 사기는 부여구수에게 다음과 같이 제보했다. >彼師雖多, 皆備數疑兵而已. 其驍勇唯赤旗. 若先破之, 其餘不攻自潰. >"저쪽 군사가 비록 수는 많으나 모두 숫자를 채운 가짜 병사일 뿐입니다. 날쌔고 용감한 것은 오직 붉은 깃발의 군대뿐이니, 그들을 먼저 깨뜨리면 그 나머지는 공격하지 않더라도 스스로 무너질 것입니다." >---- >《[[삼국사기]]》 〈백제본기〉 [[근구수왕]] 원년(375년) 11월조 [[https://db.history.go.kr/item/level.do?itemId=sg&levelId=sg_024r_0090_0010&types=r|#]] 붉은 깃발이 언급되었는데, [[고구려]]의 벽화고분으로 유명한 [[안악 3호분]]에 그려진 행렬도에 무덤의 주인으로 보이는 높은 인물 주위에 있는 병사들이 붉은 방패와 붉은 깃발을 들고 있는 것을 보면 고구려군 중에서도 정예로 추정된다. 고국원왕이 직접 친정에 나섰기 때문에 보통 고국원왕의 친위대로 보는 편이다.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pds27.egloos.com/a0053134_56bca6033be9d.jpg|width=100%]] }}} || || {{{#000000 [[357년|서기 357년]]경 그려진 고구려 행렬도의 일부 }}} || 사기의 말을 들은 부여구수는 즉시 붉은 깃발을 든 진영을 집중 타격했다. 과연 그 말이 맞았는지 고구려군은 대패하여 줄행랑을 쳤고, 백제는 5,000명이 넘는 포로를 사로잡는데 성공했다. 이때 얻은 수많은 노획물은 부여구수가 모두 장수와 병사들에게 나누어 주었다고 한다. >王以兵二萬, 南伐百濟, 戰於雉壤, 敗續. >[[고국원왕|임금]]이 병사 20,000명을 보내 남쪽으로 백제를 침입하도록 하였으나 치양(雉壤)에서 싸우다 패하였다. >----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고국원왕]] 39년(369년) 9월조 [[https://db.history.go.kr/item/level.do?itemId=sg&levelId=sg_018r_0020_0220&types=r|#]]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